창덕궁 봉모당(奉謨堂)은 규장각(奎章閣)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봉모(奉謨)’는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모훈(謀訓)이란 ‘국왕과 신하가 함께 국사를 논의하여 적은 글’ 또는 ‘국왕이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1776(정조 즉위)년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하면서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 때 본래 이 곳에 있었던 역대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지었다.봉모당은 1857(철종 8)년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攡文院)의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이는 정조가 승하한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국왕들의 어제 관리를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 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했다. 1911년 옛 이문원(攡文院)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창덕궁 억석루(憶昔樓)는 선원전(璿源殿) 남행각에 위치한 내의원(內醫院)에 속하는 건물이다.‘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고 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入審憶昔)’에서 따 온 말이며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한경지략에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 신농씨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다.
창덕궁 양지당(養志堂)은 선원전과 인정전(仁政殿) 사이에 있으며 조선 국왕이 선원전(璿源殿)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齋戒)하던 건물이다.‘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뜻이 있다. 선원전에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이 양지당(養志堂)에 머물며 ‘고상하고 엄숙한 뜻을 배양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양지당(養志堂)은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했으며 조선 국왕의 어진이나 국왕이 쓴 글씨 어필을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창덕궁 검서청(檢書廳)은 규장각(奎章閣)의 검서(檢書)들이 입직(入直)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검서(檢書)’는 ‘서적을 점검한다’는 뜻이며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가리킨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건립하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4명을 두었는데 이 검서들은 입직(入直)을 해야 했다. 이들은 번갈아서 임금의 갑작스런 하문에 대비하고자 밤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였다.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입직(入直)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이다. 검서청은 규장각의 서쪽에 있으며 순종 융희제 대에 대유재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은 세자의 학습공간 성정각(誠正閣)의 북쪽 희정당(熙政堂)과 중희당(重熙堂) 사이에 있으며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가 1874년 2월 8일 탄강한 곳이다.관물헌은 동궐도에 유여청헌(有餘淸軒)과 금사루(琴史樓)라는 편액이 같이 달렸었는데 지금은 전왕의 덕업을 계승하여 밝힌다는 집희(緝喜)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은 고조 광무제에게 난을 피하라고 강요하여 창덕궁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이어(移御)하게 한 후 이재원(李載元)의 사저인 계동궁(桂洞宮)으로 옮기게 하였으나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었다. 개화당은 창덕궁 관물헌으로 고조 광무제를 이어하게 하였고 이 곳을 개화당의 작전본부로 삼았다. 청의 위안스카이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궁중으로 들어가 12월 6일 오후에는 창덕궁 후원 일대에서 호위 중인 일병과 싸워 물리치고 관물헌에 있던 고조 광무제는 김옥균 등 개화당의 만류를 뿌리치고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왕묘(北關王廟)로 돌아갔다.
창덕궁 예문관(藝文館)은 인정전 서쪽 행각의 규범을 높인다는 의미의 인정전 서문 숭범문(崇範門)과 의례에 쓰이는 축문과 향을 관리하던 향실(香室) 사이에 위치한 관청이며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이다. 예문관의 출입문은 숭범문 바깥쪽에 이다. 예문관은 국왕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고, 사초(史草)를 작성하여 실록(實錄) 편찬의 자료로 보관하는 관청이다. 영조가 14년과 32년에 친히 행차하여 각각 ‘태공사필(太公史筆)’, ‘창수고풍(창守古風)’이란 글씨를 써서 걸었다. 1811(순조 11)년 화재로 사료와 서적이 모두 불에 탔으며 영조 어필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창덕궁 상서원(尙瑞院)은 인정문(仁政門) 남쪽 마주보이는 행각에 있는 건물이며 ‘상서원(尙瑞院)’은 ‘상서로운 기물을 맡은 관서’란 의미이다. 상(尙)은 맡는다는 의미이고, 서(瑞)는 국가의 기틀을 유지하는 모든 중요한 물건을 뜻한다. 상서원(尙瑞院)은 옥새(玉璽), 부패(符牌:마패,순패), 부임하는 관찰사, 유수(留守), 병사(兵使)에게 부여한 절월(節鉞) 등을 내고 들였다. 옥새는 대체로 국교 문서, 국왕의 명령을 적은 교유서(敎諭書), 선사 문서, 과거 사령장(辭令狀) 등에 사용되었으며 조선 국왕이 궁궐 밖으로 거동하면 옥새(玉璽)나 절월(節鉞) 등을 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태복시(太僕寺)의 말에 싣고 뒤따랐다.
창덕궁 호위청(扈衛廳)은 인정문 남쪽 마주보이는 행각에 있는 건물이며 ‘호위청(扈衛廳)’은 조선 국왕의 호종과 호위를 맡은 관청이란 의미이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궁중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인조(仁祖)는 반정에 성공한 후 숙위(宿衛)가 허술하여 중외(中外), 즉 궁 안과 민간에서 뽑은 각 군문의 무사와 함경도의 무사까지 동원하고 국구(國舅)와 재상에게 대장을 겸임케 하였다. 호위청(扈衛廳)은 정조 대에 친위부대의 역할을 하기도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하였다.
창덕궁 경훈각(景薰閣)은 침전 대조전 뒷마당의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동쪽에는 집상전(集祥殿)이 있고 서쪽에는 경훈각이 있었는데 집상전은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않았다.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로 1층을 경훈각이라 하고 초록색 기와지붕의 2층은 징광루(澄光樓)라고 하였다. 1461(세조 7)년에 창덕궁 각 방의 이름을 붙일 때 누상을 징광루, 누하를 광세전(光世殿), 광연전(廣延殿)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훈각은 광세전과 광연전이 후에 변한 것이다.이 경훈각에는 선조(宣祖)가 명나라 신종(神宗)에게서 받은 망의(蟒衣)를 보관하였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어필을 새긴 편액이 걸려 있기도 하였다.영조 대에는 중전이 승하하자 대렴(大殮)을 행한 시신을 이 곳으로 받들어 옮겼다.경훈각은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인조 25)년에 중건하였는데 1833(순조 33)년에 또 큰 불이 나 타버렸기 때문에 다음해에 중건하였다. 1917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에 중건하였는데 이 때 경복궁 자경전(慈慶殿) 북쪽에 있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다가 단층으로 건립했다.궁궐지에는 숙종이 지은 경훈각시(景薰閣詩)가 실려 있다.‘경훈(景薰)’의 ‘경(景)’은 우러르다, 사모하다라는 뜻을 취하고 ‘훈(薰)’은 ‘훈도(薰陶)’의 뜻으로 보아 ‘훈도를 우러러 사모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은 "단군" 할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삼황오제이다.
여기서는 이 중 삼황(三皇)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삼황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세 명의 임금을 이야기한다.
이 세 명은 복희씨, 신농씨, 여와씨로 알려져 있다.
이 세명의 구성을 역사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정의한다.
복희, 신농은 삼황 중 두명으로 항상 인정되지만,
세 번째 여와는 수인, 축융, 황제 등과 함께 역사서마다 다르게 기술한다.
이 세명의 왕에 대해서 다른 인물을 가르킨다는 논란이 많아,
사기를 기술한 사마천은 이들을 천황(복희), 지황(신농), 인황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 중 여와가 가장 대중적인 삼황으로 받아들여져,
복희, 신농, 여와가 일반적으로 지칭되는 삼황 세트이다
'해설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양도성에 이름새겨... (0) | 2013.09.28 |
---|---|
한명회, 강남 富村 1번지 '압구정' (0) | 2013.09.28 |
남한산성 [南漢山城] (0) | 2013.06.12 |
북한산성 (0) | 2013.04.16 |
제1차 왕자의난 (0) | 201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