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동관왕묘 (서울 東關王廟)
-종 목 보물 제142호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난계로27길 84 (숭인동)
-시 대 조선시대
서울 흥인지문(보물 제1호) 밖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중국 촉한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에게 제사지내는 묘이다. 동관왕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관왕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서울문화재
동묘는 중국 촉한(蜀漢)의 유명한 장군인 관우(關羽)를 제사하는 사당으로서 원래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관보살(關菩薩)이라고도 하며,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서 중국인의 신앙 대상이었고, 당(唐)나라 중기부터 무신(武神)으로서 관제(官祭)의 하나가 되었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가 타타르를 정벌하였을 때, 청나라 강희제(康熙帝)가 대만(臺灣)에 있던 명나라 유신(遺臣)의 폭동을 진압하려 하였을 때, 영험이 있었기 때문에 왕조의 존경과 숭상이 더욱 두터워지면서, 관우는 신성불가침의 우상이 되어 각지에 그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 무묘(武廟)]를 세웠다. 또한 재신(財神)으로서 숭배된 것은 관우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에게 잡혔을 때, 조조가 그에게 상마금(上馬金), 하마은(下馬銀) 등의 푸짐한 상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퇴하고 촉 나라 유비(劉備)에게로 돌아갔다는 고사에 따른 것이며, 도교(道敎)에서도 관우를 사후세계의 유력한 신으로 모시고 있다.
서울동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과 명나라 군대가 왜군을 물리칠 때 관우의 신령(神靈)이 여러 번 나타나서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여, 명나라의 신종(神宗)이 비용과 친필로 쓴 액자를 보내오고, 조선에서도 협조하여 선조 32년(1599)에 착공하여 2년 뒤(1601)에 완공한 것이다.
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다. 중문 내정(內庭) 좌우에는 동·서 행랑이 있다. 이어서 높은 단 위에 자리잡고 있는 단층 정전(正殿)은 전실(前室)과 본실(本室)로 구분되는 정자(丁字)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정면 5칸(57.5척), 측면 6칸(63.5척)에 양식은 익공계(翼工系)이다. 현재 건물 안에는 관우의 목조상과 그의 친족인 관평(關平) 주창(周倉)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고,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국의 다른 건축들과 비교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동묘와 비슷한 시기인 선조 31년(1598)에 경상북도 성주와 안동에도 명나라 장군들에 의해 세워진 관왕묘(關王廟)가 남아 있다. 한편 서울지역에는 동묘이외에도 서묘ㆍ남묘ㆍ북묘ㆍ중묘가 있었으며, 이중 남묘는 현재 동작구 사당동에 위치해 있다.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관왕묘(東關王廟)는 3세기의 중국 명장인 관우를 모시는 곳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왜군에 의해서 파괴된 것을,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여 재건하였다. 159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601년에 완공하였다. 1601년에는 동묘, 서묘, 북묘가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동묘만 건재해 있다.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인근에 수도권 전철 1호선·6호선 동묘앞역이 있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고 이후 문화재의 보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가운데, 동묘(東廟)도 화재와 훼손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1] 동묘 근처에서 LPG통 버젓이 사용되고 있고, 목조정문엔 타다만 담배꽁초들이 버려져 있었다.
▶관제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관제묘(關帝廟)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중앙에 관우의 위패를 두고 그 좌우에 관평(관우의 아들)과 주창(관우의 심복장수)의 위패를 둔다. 17세기 이후 중국 대륙 각지에 세워졌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한국, 대만, 홍콩,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한국의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개성에 대청관을 세우고 한성에 천도하여 소격전을 두어 3청(三淸)의 초재를 올리고, 삼청전에 3청을 비롯한 여러 도교의 신위들을 안치하였다.[1] 그 후 임진왜란으로 자연히 이것들이 없어졌으나 민간에는 관우 숭배가 전래되었다.[1]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남대문과 동대문 바깥에 관제묘가 세워졌고 지방에도 여러 곳에 관제묘가 세워졌다.
▶세계의 관제묘
-동묘(東廟)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238-1 에 소재하고 있다. 조선 선조 1601년에 지어진 건물은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베 관제묘(神戶關帝廟)는 일본 효고 현(兵庫縣) 고베 시(神戶市) 중앙구(中央區)에 위치해 있다.
-요코하마 관제묘(橫浜關帝廟)는 막부 말기에 일본 가나가와 현(神奈川縣) 요코하마 시(橫浜市) 중구(中區)에 세워졌다.
-관제묘로는 보기 어려우나,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의 숭복사(崇福寺) 경내에도 관우의 좌상을 모시고 있다.
-일본 하코다테 시에도 소규모의 관제묘가 있어 홋카이도 유일의 관제묘가 된다.
■관우(關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관우(關羽, 160년경[1] ~ 219년)는 중국 삼국 시대의 촉한의 무장이다. 장생(長生)이라는 자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雲長)으로 바꿨다. 유비(劉備)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관우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의 화신으로 민담이나 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생애 초반
정사에는 관우가 태어난 날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전장군관장목후조묘비명(前將軍關壯穆侯祖墓碑銘)≫과 ≪사전비기(祀田碑記)≫·≪관제지(關帝志)≫ 등의 기록들과 민간에 전해지는 여러 가지 설들을 종합하자면, 그는 대체로 환제(桓帝) 연희(延熹) 3년(160년)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는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張飛)와 함께 찾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관우는 하루 종일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키가 9척(한나라때 1척 = 약 23cm, 9척 = 207cm), 수염 길이가 2자(= 약 60cm)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한나라 때 1근 = 223g, 82근 = 18kg 286g)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다만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의 무기는 아니고(한나라 때에는 언월도가 아예 없었으며, 또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며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公孫瓚) 밑에서 평원상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 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백마 전투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했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袁紹)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과 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이에 대해 조조는 장료와 관우에게 공격을 명했다.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군기와 덮개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나아가 수만의 군졸속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머릴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삼국지 촉서 관우전).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라고 하며 조용히 보내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이때 관우는 여포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말(馬)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이다. 만약 관우가 적토를 타고 다녔다면 여포가 타고 다닌 적토의 2세 내지는 3세에 해당되며 그 적토 본마(本馬)는 아닌 것이다.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을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유비와의 재회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孫權)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정사에서는 제갈량과 마찬가지로 촉한의 인물들이 적벽대전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적벽대전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 역시 황개(黃蓋)와 한당(韓當)이며 관우와 장비 등은 아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주할 당시 조조가 잃은 병선은 모두 형주의 병선이었으며, 조조가 잃은 병사도 항복한 유종의 수 만 병력이었다. 즉, 지나치게 거대해진 조조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면 패주하는 조조의 육군을 포착해 섬멸해야 했으나, 퇴각로로 사용된 화용도를 적벽대전이 발발하기 바로 직전에 조비가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에, 조조의 청주병은 거의 피해를 받지 않고 양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적벽대전 종결 이후 주유는 강릉으로 쳐들어가 강릉을 함락시키게 되고, 강릉을 수비하던 조인은 양양으로 퇴각하고 만다. 세상의 원칙상으로는 2만의 병력을 동원한 손권보다 3만의 병력을 동원했던 유비쪽에 형주의 소유권이 넘어가야 했지만, 주유가 강릉을 차고 들어앉아 그의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양주, 형주, 교주, 익주, 서량을 병합한 천하이분지계'를 실행시키려 한다. 즉, 애초에 주유는 머릿속에 유비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적벽대전 후의 상황에 대해 유비와 손권사이의 확실한 논의가 없었던 탓이다. 주유의 이러한 행동에 의해 갈등이 생기게 되었으며, 상심한 유비는 마량의 헌책을 받아들여, 대신 형주 남부의 4군을 점령하여 수중에 넣게 된다. 때마침 병이 깊어진 주유가 병사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반유비파의 수장이었던 주유가 죽을 때, 후일을 맡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유비파의 거두인 노숙이었다. 이는 주유가 자신의 살아생전에는 반유비정책이 이롭다고 판단하였고, 병이 깊어져서 사망한 후에는 자신만큼 전술을 운용하는 인물이 없다는 판단 하에, 내실을 확고히 다지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친유비파의 노숙을 후임자로 택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노숙은 주유의 후임으로 선택되어 형주병을 그대로 넘겨받았으며, 오나라의 부족한 인구로는 형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 손권에게 형주를 유비에게 맡기고 장강 이남의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한다.
▶적벽 대전 이후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와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龐統)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겠다고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呂蒙)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관우와 노숙(魯肅)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서량의 마초(馬超)가 유비에게 항복했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줬다.
또 관우의 초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가, 삼국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신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말년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于禁)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서 낙양(落陽)으로 천도할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司馬懿)와 장제(蔣濟)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諸葛瑾)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느냐는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관우의 무례함이 극에 달하는 행동으로 인해 분개하던 손권은 조조와의 요청을 수락하고, 관우에게 기습을 감행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이 때 관우는 번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의 군대를 상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과 겨뤄 패하고 도망쳤다. 손권은 서황에게 패해 도망치던 관우를 공격하였고, 결국 여몽(呂蒙)의 계략으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사로잡아서 건업으로 끌고 온 뒤 참수했다. 관우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이릉 전투를 야기시켰으며, 유비와 장비의 죽음에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關興)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劉禪)이 등애(鄧艾)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이(關彛) 등 관흥의 후손들은 이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鍾會)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龐會)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인 관중진(關忠金, 관충금)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관중진은 한국 전쟁에서 인민군의 편이 되어 참전했다. 사실 관평의 후손들이 관우와 관평이 포로로 잡힌 후 참수된 이후에도 형주지역에서 계속 살아있었고 그들의 후손이 관중진이였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의 관우
나관중 저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묘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태사자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자 유비와 같이 태사자의 요청에 따라 공융을 구출하러 가서 관해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사살하고 공융을 구출한다고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유비가 직접 출동한 것은 아니고 유비가 태사자에게 정병 3천명을 빌려줘서 보내자 이 소식을 들은 관해가 포위를 풀고 도망친 것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曹操)의 허락을 받아 화웅(華雄)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孫堅)에게 죽임을 당했다.또한 관도 대전에서 관우는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실제로 관우는 안량만 주살했을 뿐 문추의 경우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荀攸)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이 공로로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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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呂布)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관우는 조조의 밑에서 유비에게로 떠나는 도중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지며,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오관참육장의 설화는 허구이다.삼국지연의에서 관우는 적벽 대전에서 대패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諸葛亮)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치겠다.”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고 하나, 정사엔 화용도에 관한 내용이 없다.
연의에서의 제갈량이 취한 강릉과 양양을 공격할 때 사용한 '공성의 계'는 허구로써, 주유가 차지한 강릉을 유비가 임대받은 것과 같다.
관우는 방덕과의 대결에서 팔을 크게 다쳐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뼈를 긁어내며 치료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기를 먹으며 바둑을 두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것을 각색한 내용이 나온다. 관우가 방덕(龐德)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華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馬良)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관우가 실제로 이런 치료를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견딘 것은 사실이지만 연의에서는 그 의원을 화타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화타가 아닌 다른 의원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관우 사망 후 손권의 축하를 받던 여몽에게 관우의 혼이 씌어 여몽이 몸의 일곱 구멍으로 피를 흘리며 죽었다고 하나, 여몽은 본래 병으로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몽은 자신이 전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임무 중에 일부를 육손과 공동으로 수행했다. 또한 손권이 이를 보고 관우를 벤 것에 대한 후환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다. 연의에서 조조는 관우의 머리를 보며 인사를 하다, 갑작스레 눈을 뜬 관우를 보고 크게 놀란다. 이에 조조는 나무를 깎아 관우의 머리를 정성스레 붙여주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길,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라고 했다. 또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은 관우는 거만하여서 유비가 오호대장군의 으뜸으로 세울 때 황충(黃忠)을 "황충같이 늙어빠진 장수가 어찌 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비난하였는데, 여몽은 이러한 관우의 단점을 이용하여 관우를 벨 수 있었다.
허나 황충과 동렬에 있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드러낸 부분을 보면 관우는 유비 세력에서 경력과 공헌에서 부동의 2인자였다. 그와 같은 동렬인 다른 장수들인 장비는 초창기부터 함께 했고, 그의 능력이나 활약을 직접 옆에서 봤다. 마초는 한때 유비,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군웅 출신이라는 이름값만 보더라도 대단한 인물이고, 조운 역시 성실히 유비를 따르며 활약한 장수라 관우는 그들이 자신과 같은 대열 직위에 있어도 불만이 없지만 황충은 조금 이야기가 틀렸다. 우선 황충은 유비가 형주에서 기반을 잡게 되고 난 후 얻은 인물이라 장비와 조운과 비교했을 때 둘이 같이 활약했던 경우가 매우 적다. 관우로서는 황충이 자신과 같은 대열에 있을만한 공훈과 능력이 있는지 알 기회가 없던 것이다. 황충이 하후연을 참살하는 활약을 펼쳤다지만 당시 형주를 지키던 관우로서는 그 모습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관우 입장에서는 딱히 뭔가 공을 세운 거 같지 않은 늦깎이 신입생이 어느 순간 자신과 같은 대열 직위에 있게 된 것이 탐탁치 않아도 이상할 점이 없다.그리고 황충이 자신과 같은 대열에 있게 된 이유를 듣자 곧 수긍하였다.
오나라와의 갈등에서도 원인을 보면 손권 쪽이 억울한 피해자라고 볼 수 없다. 우선 손권은 겉으로는 동맹이라고 하면서도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 땅의 소유권에 대해 늘 간섭하였다. 유비가 익주를 정벌하러 떠날 때는 '포로주제에 어딜 달아나느냐!'고 막말을 하였다. 거기에 몰래 여동생이자 유비의 새아내인 손부인을 몰래 오나라로 데려오는 것으로 부족해 유비의 아들 유선을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사례도 있다. 손권이 혼사를 제의했을 때도 손권 자신이 관우와 사돈이 되어 유비와 관우의 신뢰에 금이 가게 하려는 의도와 관우의 딸을 인질로 삼으려는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관우 입장에서는 결코 손권과 오나라를 좋게 볼 수 없었다.관우가 오만한 부분이 있고, 외교에서도 유연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생을 장수로서 살아온 관우가 제갈량만큼의 정치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도교에서는 관우를 신격화하여 전쟁의 신인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른다.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고 하듯이, 관우의 사당을 무묘(武廟)라 하여 관우는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다.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관우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현재까지 아무도 모르며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즉 관우의 묘는 묘(墓)가 아니고 관우의 위패를 모신 묘(廟)이다.
▶관우와 적토마
삼국지연의에는 조조가 여포로부터 몰수한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었으며, 관우가 패하여 생포당하자 적토마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관우와 같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료에는 적토마의 행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실제로 조조가 관우에게 주었다고 해도 말의 수명을 고려했을 때 오래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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