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역사실(The War History Room)
가. 선사시대(prehistoric)의 전쟁
1.석기시대- 인간의 기본욕구: 식, 의, 주. 문제( only food)- 빵문제
2.청동기이후시대: 부족의 신앙문제- 토테미즘
- 부족의 신앙, 토테미즘(totemism): 토테미즘의 유래 및 정의
유래 - 토테미즘이란 말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인 오지 브와족이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 동식 물류를 토템이라 하고 집단의 상징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정의 - 토테미즘이란 토템과 인간 집단과 의 여러 가지 관계를 둘러싼 신념, 의례, 풍습 등의 제도화된 체계를 가리킨다
- 단군왕검신화: 곰, 호랑이, 인간의 이야기
우리 나라의 토테미즘
토테미즘은 동식물 숭배의식, 희생, 정화, 금기, 신화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한국사회의 토테미즘은 고조선의 건 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 잘 나타난다.
옛날, 하느님께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환웅은 땅에서 큰 뜻을 펼치고 싶어했는데 하느님이 그걸 허락해 주시고, 풍백,우사,운사와 그의 부하 3,000명을 이끌고 환웅은 백두산 신단수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환웅은 그곳을 신시라 부르고 백성을 모아 다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사람이 되고 싶어하던 곰과 호랑이가 환웅님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환웅은 마늘 스무 톨과 쑥 한타래를 주면서 백 일 동안 굴 속에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얼마 후 굴 밖으로 나갔으나, 곰은 끝까지 남아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았습니다.
어느 날, 곰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웅녀입니다,
웅녀는 환웅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바로 단군왕검 이였습니다.
단군은 기원전 2333년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나라는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비교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참고로 단군신화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오다가, 13세기 일연이 단군신화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신화를 통하여 2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먼저, 환웅에게 찾아가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한 곰과 호랑 이 이야기는 곰을 숭상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상하는 부족으로 상징된다. 이 이야기에서 곰이 모든 어려움을 잘 견디어서 인간이 되고 그 후손이 국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호랑이를 숭배 하는 부족을 이겨서 지배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곰은 여성으로, 호랑이를 남성으로 상징화하면 당시 사회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고조선의 성립 및 국토- 만주지방 포함
-.선사시대는 대강 청동기시대까지(기원전 200년까지), 역사시대는 대강 철기시대부터
나. 삼국시대의 전쟁
1.고구려광개토대왕
-.백제정벌(임진강 일대), 거란정벌, 숙신정벌(산둥반도, 남만주를 일컬음)
2.살수대첩과 귀주대첩
-.수나라 30만대군과 을지문덕, 10만 거란군과 강감찬 장군
3.안시성전투
-.당태종이 수십만군으로 고구려침공,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의 화살, 60일간의 전투후 후퇴.
4.백제전성기의 전쟁
-.고구려 평양성 전투, 한강유역 점령.
5.신라의 삼국통일
-.신라 김유신장군의 황산벌전투, 고구려 멸망- 나당연합군과 1년 항쟁후
6.후삼국이후의 발해와 당의 전쟁
-.무왕이 당을 공격(거란이 발해협조)
다. 신라와 당의 전쟁
1.매소성 전투- 연천, 전곡유역, 산성축조 및 기계식화살 사용: 당의 20만대군 격퇴,
7년 나당전투의 종지부
2.장보고(신라후기)- 장보고기념관: 해남읍, 중국 산둥성
라. 거란과 몽골의 고려침공
1.거란의 침입: 4회
2.몽골의 침입: 7회, 원나라의 간섭: 40년, 원의 부마국
마. 조선- 병자호란 1636년 인조
1.병자호란의 원인
1636년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약체인 군사력,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기, 즉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후금)이 강해지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조선은 일찍부터 명나라에 조공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명나라는 이전에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구원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읽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그것이 불만인 조선내 신하들은 쿠데타를 감행하고, 광해군을 내쫓은 후 새로이 '인조'를 임금자리에 앉힙니다. 이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합니다. 새로 들어선 인조정부는 광해군과는 정반대되는 정책, 즉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금의 태종(홍타이치)은 조선을 침략합니다.
2.병자호란의 경과
1차적으로 쳐들어온 후금군은 대략 4만에서 5만명이었습니다. 이것만해도 당시 조선은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를 의식한 후금은 조선과의 형제(兄弟)관계만 맺고 돌아갑니다. 물론 형은 후금이죠. 그리고 몇년 후 세력이 엄청나게 커진 후금은 이미 약골로 전락한 명나라군을 짓밟은 후에,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합니다. 즉 후금이 왕이고 조선이 신하를 하라는 거였지요. 조선왕조는 이를 거부하고,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라는 격문을 전국에 배포합니다.
이것에 분노한 홍타이치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에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이에 청군은 본국에서 증원한 4만명의 군대를 더해 20만대군으로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합니다. 그리고 강화도로 도망쳤던 왕비와 세자등을 몽땅 잡아와서는 남한산성앞에서 조선왕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 남한산성안에는 만 3천명의 군사와 한달분의 식량밖에 없었습니다. 모든면에서 절망적인 인조는 항복할 뜻을 표시합니다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삼전도의 치욕을 씻기 위해 조심스럽게 북벌을 추진하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8)
1.임진왜란의 3대첩: 한산도대첩(이순신장군-학익진), 진주대첩-진주목사 김시민장군, 행주대첩- 권율장군
2.이순신장군의 3대첩: 한산도대첩(1592), 명량해전(1598년 9월), 노량해전(1598. 11월, 이순신장군 전사, 정유재란의 끝)
사. 6.25 전쟁
아. 해외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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