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의 마음은 무엇일까??? 딸자랑? 서양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내딸, 신문기사를 통하여 알아 보려 합니다!! 아빠마음은???
아트인컬쳐 2010. 12월호 pp185
전은숙전
노암갤러리
2010.10.27~11.2
글-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파편화되어 흩어지는 이 작은 그림들은 벽 전체로 파생되어 나간다. 크기의 차이에 따른 그리고 높낮이의 변화에 따라 기존 회화 감상과는 조금 다른 어질한 감각을 안긴다. 전체가 아닌 부분에 주목하는 시선이 훑어나가듯이 관찰한 것은 도시 풍경, 그러니까 특정 공간의 디테일이다. 젊은이들의 주로 모이고 서로가 서로를 탐닉하는 시선들이 끈적거리는 혹은 무심히 미끄러지는 장소, 다름아닌 클럽이나 카페, 노래방, 특급호텔의 바 등이다. 간혹 고급 스시집, 회전초밥집도 있다. 그곳은 작가가 개인적으로 접하는 공간이자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곳, 가장 볼거리가 많은 곳, 시선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들이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실내 인테리어가 그렇고 그곳에 모인 이들의 세련되고 ‘시크’한 패션과 화장, 악세사리, 구두와 가방 그리고 그것들과 한쌍을 이루는 명품 몸매들이 고른 치아처럼 놓여있다. 어쩌면 그 몸들도 주변 인테리어나 소도구들과 구분 없이 녹아있다. 아마도 오늘날 젊은이들은 카페나 커피빈같은 곳에 안ㅌ아 커피를 마시며 고급 브랜드, 이른바 명품 가방과 구두, 시계와 화장품 광고로 가득한, 신상품에 대한 세세한 정보로 채워진 잡지를 뒤적이며 올시즌의 패션 아이템과 사고 싶은, 마음에 드는 물건들의 목록과 이름을 암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 기억력으로 다시 영어책을 보고 단어를 외우고 토플과 토익점수 올리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그러는 순간 친구들이 오고 그들은 연예인의 사생활과 그들의 패션에 대해 길고 긴 수다를 떨것이다. 부모에 기생하는 백수의 존재로서, 혹은 88만원세대로서,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왔지만 경제적인 독립은 요원한 이들이 이 소비 공간에 모여 할 수 있는 일은 잡지에 실린 명품 브랜드에서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여기는 상품의 이름과 목록을 외우고 이를 구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비용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로 귀결될 것이다. 부모가 돈이 많은 이들은 그런 고민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자 하는 명품 아이템과 가질 수 없는 아이템사이에서‘전지구적 고민’을 할 것이다.
더러는 셀카를 찍고 누구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데 오후의 긴 시간을 다써버리고 있기도 하다. 슬쩍 슬쩍 주변사람들을 훔쳐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이성의 옷차림과 몸매를 살피기도 한다. 클럽에서는 멍하니 ‘죽때리며’ 앉아 스테이지에서 춤추는 이들이 몸놀림을 표정 없이 바라볼 것이다. 나른하고 권태롭게 말이다. 더러 썬글라스 너머로 써클렌즈 안에서 상대방의 패션과 감각, 취향과 기호, 그리고 그런 것들을 사고 걸칠 수 있는 경제적 능력 등을 환산하면서 머릿속이 무척 복잡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의 풍경도 빈부의 격차에 따라 사뭇 다르다. 강북과 강남의 카페나 클럽 분위기나 그곳에 모이는 이들의 자태 또한 다르다. 하여간 이러한 공간들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 공간이자 그들의 정체성 감각 욕망등을 발원시키는 소비적 공간이기도 하다
전은숙은 그러한 공간을 소요하듯이 바라보고 이를 휴대폰으로 촬영했다. 그리고 그 작은 화면을 ‘소스’로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당연히 그림은 세련된 인테리어와 반짝이는 실내장식과 조명, 끊임없이 들려오는 음악소리, 소란스러운 분위기, 나른한 관능, 끈적한 시선들이 기이하게 흘러 다니는 공간에 맞게 유동적이다. 물감과 붓질은 흔들리고 대상의 윤곽은 불분명하고 시선과 구도 역시 느닷없는 절취의 프레임으로 보인다. 그 작은 화면들이 벽면에 흩어져 있다. 이 같은 디스플레이는 분산적인 시선과 그로인한 감수성과 욕망의 요동을 흥미롭게 그려가고 있다. 이 같은 디스플레이는 분산적인 시선과 그로인한 감수성과 욕망의 요동을 흥미롭게 그려가고 있다. 나로서는 전은숙의 그림에서 동시대 소비사회의 공간과 그 공간에 모인 젊은이들의 생태를 무심히 전달해내는 붓질과 시선을 재미있게 본다. 그것은 보들레르식의 도시의 산책자가 본 ‘현대성’만큼이나 우리시대의 동시대성을 전달해 주는 관찰자의 시선이다.
작가는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서양 사람도 아닌 아이 같은 이상한 눈동자로 변하는 써클렌즈를 끼고 일상의 공간을 바라본다. 세상을 분명 멀쩡하게 보고 있지만 상대방의 눈에는 사시처럼 눈동자가 궤도를 이탈하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써클렌즈가 미끄덩거리는 것이다. 이렇게 미끌거리는 현상을 훌라현상이라고 한다. 전은숙은 이른바 그 훌라현상으로 도시공간, 소비적 공간을 무심히, 그러나 주의깊게 보았다. 이 표피적이고 인공적인 화려함과 더없이 ‘시크’해 보이며 덧없이 부유하는 관능성과 미끌거리는 욕망이 마구 혼재된 곳의 표면을 옮겨 다니고 있는 것이다. 너무 달라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이 떨어지지도 않는 거리에서 말이다.
제민일보
2008년 11월 06일 (목) 18:07:13 문정임 기자 mungdang@hanmail.net
"천박한 욕망에서 안도하는 삶"
4인 릴레이 개인전 전은숙 편
갤러리 하루, 11월11일까지
첫 번째 주자 전은숙씨(28)는 거울에 비치거나 카메라에 찍힌 사물처럼 한번 다른 곳에 걸러진 대상물을 그린다.
제주출생으로 성균관대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전씨는 이번 전시에서 욕망의 천박함, 심리적 성형수술, 자기부정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삶에 대해 발언하고 있 다.
'self plastic surgery' 란 첫 번째 개인전(2005·서울 성균갤러리) 주제에서 알 수 있듯 전씨는 풍선껌을 부풀리듯 화려하게 꾸며졌지만 실상은 가장 어둡고 후미진 우리의 욕망을 직시하는 무서운 작가다.
뭉개진 피부, 윤곽이 구별되지 않는 코와 입술 등 작품에 드러나는 희미한 인물상은 작가 자신이면서 소비자본주의의 헛헛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작품은 욕망과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비난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전씨는 삶의 깊이가 주는 울림을 거부하고 표피 치장에 몰두하는 욕망을 흉포성을 지적하면서도 그런 욕망속에서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발언하는 셈이다.
전씨의 작품은 오는 11일까지 전시된다. 개관시간=오전11~오후6시. 문의=762-3322.
2003년
개인전 서문
글 민은주
만약 당신의 욕망이 고상하고 세련된 형태를 띠고 있다면, 안됐지만 그것은 가짜이다. 필요에 따라 마음 편하게 꺼내 보일 수 있도록 기망한 욕망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내장 깊숙이 숨겨둔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은 놀랄 만큼 속물적이고 천박하며 비계가 잔뜩 낀 고깃덩어리처럼 미끄덩거릴 것이다. 그것은 (오직 내가 나라는 하찮은 근거만으로) 자신이 더 아름답고, 더 특별하며, 더 주목받을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라는 욕망이다. 그렇게 나를 치장하여 실제의 내가 아닌 어느 지점으로 옮겨놓으려는 욕망에 주목해서, 전은숙의 최근 작업들은 자신과, 자신이 욕망하는 또 다른 자신 사이의 어느 지점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다.
미끄러질 듯, 전은숙의 화면은 기름을 잔뜩 발라 비릿한 소녀의 입술처럼 번들거린다. 그 기름기는 바로 전은숙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나를 욕망한다는 것은 나를 나보다 잘난 나, 그래서 결국 내가 아닌 나로 만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작가본인이 이름 붙이듯 그것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성형수술이며, 눈 뜬 채 꿈꾸는 행위, 명백한 자기부정이다. 자신이 실제보다 더 뛰어나기를 바라는 욕망은 스스로를 타자로 바꾼다. 전은숙은 그것의(자신이 타자로 전환되는 지점의) 시작을 폴라로이드, 스티커, 디지털카메라, 핸드폰카메라 같은 즉석사진에서 찾는다. 제목에서부터 그 시작점을 숨기지 않는 [누워서 한 컷. 도판1]에서 피부가 뭉개지고 코와 입술의 윤곽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희미해진 인물은 작가 자신이고, 또한 작가가 꿈꾸는(욕망하는) 전은숙이며, 동시에 자신의 표피를 마음껏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소비자본주의의 헛헛한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분열적인 자아가 뻔뻔하게 드러나는 [나&나 도판2.]에서 어렴풋이 웃고 있는 것은 전은숙도 전은숙이 욕망하는 전은숙도 아니다. 무서워라, 거기서 웃는 것은 그저 욕망뿐이다.
자신을 욕망하는 욕망, 사람들은 그 은밀하고 우스꽝스러운 욕구를 스티커사진이나 디지털 카메라, 핸드폰 카메라와 포토샵으로 간단히 충족시킨다. 즉석사진의 용도와 목적은 명백하다. 그것들은 오직 당신을 실제보다 더 하얗고 더 날씬하고 더 예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길거리 어디에나 널린 스티커 기계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카메라들, 쉽게 다룰 수 있는 포토샵, 자신을 치장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당신과 당신의 세계를 빠닥빠닥한 포장지로 뒤집어 덮어 버린다. 그러나,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은숙은 소비사회가 보여주는 욕망의 비진정성, 난잡한 공갈 반짝거림을 고발하거나 비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은숙은 삶과 삶의 깊이가 주는 울림을 거부하고 오직 표피만을 치장하는 욕망의 흉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욕망을 필요로 하고 그 욕망 속에서 위안을 찾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한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욕망하지만 그 욕망을 변명하거나 다시 욕망(왜곡)하지는 않는다. 욕망에 중독되어, 욕망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면서, 다시 그 욕망을 의심하고 반성하는 전은숙의 태도는 위태위태하면서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확실한 것은 전은숙의 작업을 디지털이미지의 무분별한 베낌에서 극복시키는 지점이 욕망의 가치판단을 배제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를 유지하는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작가가 복잡한 욕망의 근원지를 즉석사진기 같이 비정신적인 물체에 전가하는 가난한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작가는 욕망이 유희가 되어 요동치는 과정[클럽 샤브에서, 도판3.]에 주목하고, 일상의 표피에만 적용되는 아름다움[야시시커튼, 도판4. 뽀샤시풍경, 도판5. 빤딱빤딱금커튼, 도판6.]을 관찰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삶에 대해 발언하고자하는 또 다른 욕망을 찾아다닌다. 풍선껌을 부풀리듯 팬시하게 꾸며놓았지만, 실상은 가장 어둡고 후미진 우리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작가의 무표정이 미덥다. 나는 그저 욕망의 결을 따라 동동 떠다니는 몽롱하고도 무시무시한 이 여행 중에 젊은 작가가 쉽게 지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