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고 느끼고 체험하자

경복궁과 세종, 구종직,조대비,을미사변

step1004, JUN 2012. 4. 2. 08:39

 

 

 

경복궁의 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개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광화문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으로, ‘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역사

임진왜란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에 들어서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시켰고,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광화문은 1969년 박정희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원래의 것과는 다른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위치 또한 당시와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현재 박정희 때 지은 광화문을 헐고 원래의 형태로 새로 짓고 있다.

다음은 원래 이 문을 정문으로 이름 붙였던 정도전의 설명이다.

다음은 근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그 정문(正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천자와 제후(諸侯)가 그 권세는 비록 다르다 하나, 그 남쪽을 향해 앉아서 정치하는 것은 모두 정(正)을 근본으로 함이니, 대체로 그 이치는 한가지입니다. 고전을 상고한다면 천자의 문(門)을 단문(端門)이라 하니, 단(端)이란 바르다[正]는 것입니다. 이제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함은 명령과 정교(政敎)가 다 이 문으로부터 나가게 되니, 살펴보고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참소하는 말이 행하지 못하고 조작과 거짓으로 부탁하지 못할 것이며, 아뢰고 복명함이 다 이 문으로 들어와서 윤허하신 뒤에 나가게 되면, 사특한 일이 나올 수 없고 공로[功緖]를 상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을> 닫아서 이상한 말과 기이하고 사특한 백성을 끊게 하시고, 열어서 사방의 어진 이를 오도록 하는 것이 정(正)의 큰 것입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정도전

복원사업

2007년 현재 광화문은 문화재청이 2006년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철근콘크리트조로 재건(1968년)된 현재의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기위해 철거해체되었다

 

 

신무문

파일:Gyeongbokgung-08.jpg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흥례문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파일:Korea-Gyeongbokgung-Guard.ceremony-08.jpg

흥례문
 

영제교

근정문

 

파일:Guards.at.Gyeongbokgung-01.jpg
 
근정문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창덕궁의 금천교, 창경궁의 옥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 하다.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건춘문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동쪽은 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천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근정전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보제223호로 지정되었다.

 

 
근정전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에 측면 5칸인 다포계 팔작 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역사

1395년(태조4년)에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정도전이 ‘왕의 부지런한 자세가 정치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근정전의 이름을 지어올렸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867년(고종4년)에 재건되었다.

개요

근정전은 조선 시대 궁궐의 법전 가운데 유일하게 상월대와 하월대에 난간을 두르고 복을 가져다 주는 돌짐승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瑞獸)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붕이 문양으로 장식된 청자기와로 지어져서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烽屛)으로 둘러쳐진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용 2마리를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이름의 유래

다음은 근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한 것만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하게 봉양하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사정전

 

파일:Korea-Gyeongbokgung-Sajeongjeon-03.jpg

 
사정전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강녕전

파일:Korea-Gyeongbokgung-Gangnyeongjeon-01.jpg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령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다음은 정도전의 설명이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수정전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경회루

 파일:Gyeongbokgung-Gyeonghoeru-03.jpg

 
경회루와 연못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연을 베풀던 곳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들이 있다. 방지의 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초창기에는 태조가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다락집이었으며, 1412년에 태종이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여 지금의 경회루의 모습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867년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현재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교태전

파일:Gyeongbokgung-KyoTaeJeon.JPG

 
교태전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강령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위치하고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령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아미산

파일:Korea-Gyeongbokgung-Amisan-01.jpg

 
아미산 굴뚝

보물 제811호. 아미산(峨嵋山)의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자경전(慈慶殿)

파일:Jagyeongjeon.JPG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興善大院君)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1867년(고종4)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지은 전각으로, 두 번에 걸친 화재로 불탄 것을 1888년(고종25)에 다시 지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국화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자경전의 굴뚝에는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는데 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집경당

아미산 북쪽에 침전에 속하는 흥복전(興福殿) 등이 있었다. 40칸 크기의 흥복전, 51칸 반 규모의 광원당(廣元堂)을 비롯하여 10칸의 다경각(多慶閣), 28칸의 집경당(緝敬堂), 17칸의 함화당(咸和堂), 18칸의 영훈당(永熏堂)이 있었고, 집경당 북쪽에도 여러 전각들이 향원정(香遠亭)을 가운데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 그 일곽의 전각과 행각은 다 없어지고 집경당과 함화당만이 남아 있다.

 

향원정(香遠亭)

파일:Gyeongbokgung-HyangWonJeong-01.jpg

 
향원정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건청궁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에 지어졌으며, 1909년이전에 철거되었다가 복원되어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명성황후의 시해현장입니다

집옥재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태원전

태원전(太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자선당

파일:Kyungbok Palace 122.jpg

 
자선당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 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 빈이 살았다.

비현각

 
비현각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편전이다

 

 

 

1.건축양식

강녕전

 강녕전은 정면 11칸,측면 5칸 규모로 초익공의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경회루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자리엔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경복궁 재건시에 경회루도 중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

교태전

정면9칸, 측면 7칸 규모의 교태전과 좌우로 익랑이 연결된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근정문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시설을 하였다.
근정전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 하여 넓고 높다.근정전 둘레에 이간통의 행각이 있고 남행각 중앙에 다락문인 근정문이 있다. 옛날엔 근정문 남쪽에 흥례문, 그 남쪽에 정문인 광화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행각에서 남행각으로 꺾이면서 두 번째칸 기둥 앞에 서서 약간 굽힌 자세로 바라다보면, 근정전의 우람한 자태와 처마곡선이 북악산의 흐르는 선과 조화되어 선율을 이룬다.
향원정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흥례문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상층간포는 도리통 어칸은 3구, 양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7포작 외2출목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5포작이다.

사정전

근정전의 뒷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자경전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2.잡상(雜狀)

잡상이라하면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로 만든 장식기와 입니다

잡상은 주술적 의미를 지니므로 홀수로 구성됩니다. 잡상의 형태는 마지막형상은 세지 않습니다

 

경회루 잡상(11개)

근정전 잡상(7개)

자선당 잡상((9개)

근정전의 잡상 숫자도 마지막 큰 모양은 세지 않아야 7개가 됩니다.

원래 중국에서 잡상은 황제가 있는 건물은 11개, 태자가 있는 건물은 9개, 기타는 7개 이하로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회루와 근정전의 잡상 숫자가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단순히 기와지붕의 크기 차이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붕의 내림마루 크기로만 보면 경회루가 근정전보다 더 크므로 더 많은 수의 잡상이 있어야하는 건축균형미 입니다

 

3.용마루가 없는 건물은 강령전 교태전 입니다  용마루를 없앤 이유는 군주가 있는 근정전이상에 더 높은 건물은 용마루를 없애 군주의 위엄을 돋보이게한것입니다

4.현존전각중 가장오래된곳은 근정전 입니다

5.집옥채건축양식은 중국양식 입니다

 

 

 

 

[상세내용]

구종직(丘從直)에 대하여
1404년(태종 4)∼1477년(성종 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정보(正甫). 고려 때의 판서 구천우(丘天雨)의 증손, 증의정부우찬성 구양선(丘揚善)의 아들이다.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로 급제하고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1447년 영동현감, 1455년(단종 3) 좌헌납, 1456년(세조 2) 1월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좌헌납, 다음해 8월 원종공신 3등에 책록, 곧 낙안군수(樂安郡守)로 파견, 성균관사성으로 입조하였다가 1462년 다시 고성군수로 나갔다.

1465년 10월 성균관직강으로 있을 때 세조와의 역리강론(易理講論)으로 인정을 받고 첨지중추부사 겸 사성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친강(親講)때마다 역리를 논하는 영광을 입었다.

1466년 2월에 공조참판, 6월에 수공조판서가 되었으며, 8월에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1467년 행호군(行護軍)으로서 새로이 제정한 형전(刑典)을 교정하고, 이어서 행첨지중추부사, 1468년에 행지중추부사, 1469년에 성종이 즉위하자 행첨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 1471년(성종 2) 경연 때의 언사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경연직을 박탈당하면서 행상호군, 이듬해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으며, 벼슬이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과 경학에 밝았다.

일화로서 문과에 오른 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하루는 숙직을 하다가 경회루의 경치가 매우 좋다는 말을 듣고 평상복으로 경회루 연못가를 산책하였다. 때마침 세종이 내시 몇 사람을 거느리고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황급히 왕 앞에 엎드렸다.

그러자 세종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을 외울 줄 아느냐?”고 물으므로, 그가 《춘추》 한권을 줄줄 암송하니, 세종은 크게 감탄하고, 이튿날 그를 교서관부교리에 임명, 9품직인 정자에서 하루아침에 종5품직인 홍문관부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자경전과 신정왕후(조대비)

신정왕후는 순조의 왕세자 효명세자(추존 익종)의 부인이며 헌종의 어머니이다.헌종이 익종을 추존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대원군이 조대비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다.

  

정의

1808(순조 8)∼1890(고종 27). 익종(翼宗의 : 제23대 순조의 세자)의 비(妃).

개설

풍양조씨(豊壤趙氏). 헌종의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풍은부원군 만영(萬永)이며,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인 목사 시연(時淵)의 딸이다.

12세 때 익종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년(순조 27)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으로 추봉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생애

1857년(철종 8) 순조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後嗣)도 없이 승하하자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왕실의 권한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그 전부터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및 조카인 조성하(趙成夏)와 손을 잡고 있었으므로 즉각 흥선군의 둘째아들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또한, 안동김씨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해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1866년(고종 3) 2월까지 계속 수렴청정을 하며 관리 탐학 방지, 진휼(賑恤), 황해도 도장(導掌) 폐해 엄금, 공폐(貢弊) 제거 등을 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흥선대원군에게 모든 정권을 잡도록 하교한 바가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가 정치에 참여하기 이전까지는 효도를 다하였으나, 그 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질투를 두려워한 대왕대비가 고종을 피하였다.

또한, 친정 세력들을 대거 기용하였지만, 그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가문이 쇠락해지고, 더욱이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능은 수릉(綏陵)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

을미사변

 

정의

1895년 8월 20일(양력)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 살해사건.

개설

명성황후시해사건(明成皇后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내용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비인 민비(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왜곡했기때문이다. 미우라는 대원군이 사건을 주모하였으며 왕후의 시해는 조선군 훈련대가 자행한 것이라고 위증하였는가 하면, 공정한 재판을 통해 자국의 불명예를 씻겠다던 일본정부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들어 범죄에 관련된 일본군민 모두를 무죄 방면하였다.

나아가 사건 현장에 참여했던 기꾸치 겐죠(菊池謙讓),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등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의 일본인 기자는 후일의 저작(≪대원군≫, ≪조선근대사≫, ≪민후조락사건≫, ≪조선잡기≫ 등)을 통해 대원군과 왕후의 갈등구도로 한국근대사를 날조하였고, 이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술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 일반에게는 이 사건이 일본의 국가적 범죄라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반면 일본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일본측 연구자들은 미우라가 단독으로 계획하여 자행한 것으로 그 이상의 배후는 없으며 조선측에서도 대원군이 적극 협조하였다는 입장이다.

즉 민왕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미우라가 공모한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사건 현장의 지휘구도에 대해서도 일본군 장교 대신 낭인배의 역할이 중심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이 이 음모와 무관함은 재일사학자 박종근(朴宗根)이 이미 일본측 자료의 정밀한 추적을 통해 밝혀 놓은 바 있고, 사건의 주요 무력 기반이 일본군이었음도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였던 야마베 겐따로(山邊健太郞)가 밝혀 놓았다.

남은 의문은 사건에 대원군이 간여했는가, 혹은 일본 정규군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라는 것이 아니라, 사건 배후구도는 어떠하며, 일본측이 민왕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정부가 여타의 수단을 배제한 채 그토록 야만적인 수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한국측 연구자들은 일본정부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고 보고 있다. 대원군의 요청에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선선히 응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거니와 조선군 훈련대의 거사에 일본군이 요청을 받아 지원을 해 주었다는 논리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본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정부의 지시도 없이 그와 같은 범죄를 독단적으로 계획하고 자행하였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일전쟁에서 이 사건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만주를 둘러싸고 전개된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목표는 서세동점의 위기를 타개하고 자국의 활로를 모색한다는 취지하에 설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었다.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청국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러한 인식은 이미 1890년대초에 드러나고 있었다. 수상 야마가타(山縣有朋)는 그의 의견서(1890.3)에서 ‘일본의 이익선의 촛점은 실로 조선에 있으며 ……조선의 독립은 시베리아철도가 완공되는 날 살얼음을 딛는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1880∼1890년대에 걸쳐 일본이 군비확충에 박차를 가한 것이나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조선과 만주에 밀정을 파견하여 정보수집에 열중하였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일본이 광개토왕능비문의 탁본을 입수하여 비문 날조를 시도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이렇듯 일본은 조선침략을 치밀하게 준비해 왔으며, 1890년대 초중반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봉기(1894)는 일본이 고대하던 전쟁 도발의 적기로 포착되었다. 농민봉기는 그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일본에게 적절히 이용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하관조약(1895.4.17)을 통해 ‘청국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인한다(제1조)’ 하였고, 요동반도의 할양(제2조) 등을 명시하였다.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기정사실화 한 것이었다.

나아가 일본의 모든 전쟁비용을 상회하는 2억냥의 배상금을 부과시켜 청국의 재정을 곤두박질치게 하는 대신,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행태에 제동을 건 몇몇 나라가 있었다. 가장 민감한 대응을 보인 쪽은 러시아였다.

청일전쟁 초기 관망하던 러시아는 전장(戰場)이 만주로 확대되자, 일본의 목표가 자국의 시베리아횡단철도에 향해져 있음을 깨닫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이어 강화조약에 요동반도의 할양이 명시되었음을 확인하자, 러시아는 즉각 일본의 행동을 견제하려는 쪽으로 방침을 굳히고, 불·독을 끌어들여 삼국간섭(三國干涉, 1895.4.23)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군을 만주지역에서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세력과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引俄拒日)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Karl I. W○ber : 韋貝)였지만, 조선측의 핵심 인물은 민왕후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베베르는 영·미·불 등 열국공사와 함께 이노우에를 방문하여, 한반도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독주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왕후는 이노우에의 행동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섰는데, 때문에 이노우에의 조선 ‘보호국화’ 기도가 장벽에 부딪쳤다.

이후 일본에서는 요동반도 환부와 조선문제의 처리를 놓고 비상이 걸렸다. 내각회의가 거듭되었고(6.4), 이노우에도 본국에 휴가를 요청하여 귀국하였다(6.7, 서울 출발. 6.20, 요코하마 도착). 일본에 도착한 이노우에는 (1)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三浦梧樓)를 추천하고, (2) 내각회의에서 500(후에 300)만엔을 조선에 제공할 것을 건의하였다(7.10∼7.11).

그런데 일본정부가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예비역 장성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측 당로자들의 주장은 모호하다. 이토(≪伊藤博文傳≫)는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추천하였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라 하였다.

반면에 이노우에(≪世外井上公傳≫)는 미우라의 파견은 이토가 결정한 일이라 하였으며, 미우라 자신은 이토와 이노우에가 자신을 한국으로 밀어내듯 쫓아보냈다(≪觀樹將軍回顧錄≫)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사태에 대해 이토는, “만일 종래처럼 한국의 개혁을 추진한다면 러시아의 방해를 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중단한다면 일청전쟁은 전혀 그 의의를 상실하는 동시에 도리어 러시아에게 한국을 엿볼 수 있는 기회까지 허용할 우려가 있어 난처하다”(≪이등박문전≫)고 하였다.

사진기까지 휴대하고 왕후시해의 현장에 ‘출동’하였던 한성신보사(서울의 일본신문사) 기자 고바야카와도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의도에서 보거나 거액의 전비를 쓰고 자국의 청년들을 희생시킨 점에 비춰 본다면, 또한 동양장래의 평화와 일본제국의 영원한 안위를 생각한다면, 러시아세력의 신장을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니 ……오로지 비상한 수단으로 한러 관계를 차단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즉 러시아와 왕실이 굳게 악수하며 서로 호응하고 온갖 음모를 다함에는 일도양단(一刀兩斷)!……환언하면 왕실의 중심이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러시아로 하여금 결탁할 당사자를 상실케 하는 이외에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에 민후를 궁중에서 제거한다면 베베르 같은 자가 누구를 통해 한국의 상하를 조종할 수 있겠는가......한국의 정치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있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 (≪민후조락사건≫).

일본정부의 당면 과제는 조선문제의 처리였고, 그것은 러시아와 상대할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상대하지 않고 조선 문제를 처리하는 손쉬운 방법은 직접 조선쪽을 상대하여 러시아와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었다.

일본이 당면한 내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향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조선의 어떤 인물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미리 쐐기를 박자는 정략이기도 했다. 조선인들에게 공포심을 자아내 일본에 대한 저항의욕을 봉쇄하려는 심리전적 조치이기도 했다.

외교에 문외한인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가 떠밀다시피 하여 주한공사로 파견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일본의 내각회의에 참석한 뒤, 7월 하순 서울로 돌아온 이노우에는 종래의 위압적 자세를 전환, 미처 확정되지 않은 300만엔 기증금 제공 건을 확언하며 고종과 왕후의 환심을 사려하였다.

이노우에는 후임자인 미우라가 부임(공식임명 : 8.17, 서울도착 : 9.1)하였지만, 업무인계를 핑계로 17일간을 일본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가 서울을 떠난 것은 9월 17일, 인천에서 4일간 더 머물다가 일본으로 향했으니,(9.21) 왕후를 시해하기 불과 17일전이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직후 서울에서는 왕후제거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10월 3일 일본공사관 밀실에서 미우라·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 공사관 서기)·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 공사관부무관 겸 조선군부고문)·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 : 포병중좌) 등이 왕후시해의 구체안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조선정부의 일본인고문, 한성신보사 사장과 기자, 영사경찰, 낭인배 등을 고루 동원하였다. 만일의 경우 사후 책임전가를 위해 왕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교관은 일본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10월 8일 새벽 일단의 일본인패들이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을 납치하여 경복궁으로 향했다. 한편 일본인교관은 야간 훈련을 실시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군 훈련대를 경복궁까지 유인하였다. 계획이 개시된 것은 새벽 5시(일본측 자료는 5시 45분으로, 약 한시간 오차). 경복궁담을 넘어간 일본인들이 일본군의 엄호하에 광화문을 열어 제쳤다.

일본군에 이어 일본인들이 호위한 대원군의 가마와 훈련대가 밀려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궁궐 시위대병사 8∼10명과 홍계훈(훈련대 연대장)이 희생되었다. 일본군의 습격은 북문으로부터도 있었다. 광화문쪽에서 총성이 울리자 이미 북서쪽의 문(추성문), 북동쪽의 문(춘생문)을 통과한 별도의 일본군이 북쪽의 문(신무문)을 공격해 들어갔다.

경복궁에서는 숙위 중이던 시위대 교관 다이(William McEntyre Dye, 茶伊)와 연대장 현흥택의 지휘하에 비상 소집된 300-400명의 조선군 시위대가 저항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곧 무너졌다. 이후 왕후의 거처에서 만행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사방의 출입구를 봉쇄하였다.

사복차림의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하였고, 일본군장교(2명)가 이를 보조하였다. 주한영국영사 힐리어(Walter C. Hillier)는 사건의 현장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1895.10.11).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하에 침입한 민간인 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의(조선군 복장을 한)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후의 처소로 돌진하여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 때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서둘러 왕후에게 급보를 전하였고, 왕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던 순간이었다. 그 때 흉도들이 달려 들어오자 이경직은 왕후를 보호하기 위해 두 팔을 벌려 가로막았다. 흉도들 중 하나가 왕후를 찾아내기 위해 왕후의 사진을 손에 지니고 있었던 데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오히려 흉도들에게(왕후를 알아보게 하는) 용이한 단서가 되었다. 이경직은 내려친 칼날에 양팔목을 잘려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후는 뜰 아래로 뛰쳐나갔지만 곧 붙잡혀 넘어뜨려졌다. 그 뒤 흉도들은 왕후의 가슴을 짓밟으며 일본도를 휘둘러 거듭 내려 쳤다.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해치우기 위해 그들은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몇몇 궁녀들까지 함께 살해하였다. 그 때 왕후의 의녀(女侍醫)가(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손수건으로 왕후의 얼굴을 가려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 지고, 나머지는 궁궐밖으로 옮겨가 처리되었다”(≪주한영국영사의 보고문≫).

상황이 일단락되자 일본인들은 왕후의 침소까지 약탈하고 유유히 광화문을 빠져나갔다. 한편 일본공사관에서 초초하게 사태의 결과를 기다리던 미우라는 고종의 부름에 응한 형식으로 입궐하였다(6시경). 그러나 즉시 그는 사태의 은폐공작에 들어갔다. 먼저 고종을 핍박하여, 당일로 신내각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며, 고종이 왕후를 폐한다는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 그런데 고종의 서명도 없는 날조된 조칙이었다. 이어 그는 사건을 조선군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였다.

다음날 이 사건의 ‘범죄자’들인 훈련대를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가담하였다는 ‘소문’의 사실여부를 규명해 달라는 위장된 내용의 문서를 외부에 보내, 조선측 스스로가 일본군민의 가담을 부인하는 희한한 공문까지 확보해 두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일부터 서양외교관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당시 만행이 왕태자·다이·사바틴(다이의 보조역)·현흥택·의녀(醫女)·궁녀·궁중하인 등에 의해 각기 다른 위치에서 목격되었고, 열국 외교관들도 이를 간접적으로 접하였기 때문이다. 알렌(미국공사관 서기)이 총소리에 놀라 깬 것은 새벽 5시. 곧 이어 이범진으로부터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고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함께 입궐하였다.

그들은 궁궐에 도착하여 산만한 복장의 칼찬 일인들이 광화문에서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7시). 입궐 후 한시간 반 가량을 기다리다가 방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고종과 미우라가 있었다.

당시 미우라는 고종에게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렌 등이 직간접으로 접한 현장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일본군·영사경찰·공사관원·낭인배 등이 왕후시해를 자행하였음과 미우라가 이들의 사주자임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알렌·힐리어(Walter C. Hillier : 영국영사)·웨베르 등 주한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의 특파원 코커릴 등에 의해 사건이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초 일본정부는 외교와 언론 등을 통해 일본 군민은 사건과 하등 관련이 없으며, 대원군과 조선왕후의 ‘중세적’ 정권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변병하였다. 그러나 열국 여론의 비난을 받은 일본정부는 미우라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시인하면서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천명하였다.

이어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주한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이노우에를 왕실문안사라는 명목으로 서울에 파견하여 사태 호도에 나섰다. 아울러 미우라와 스기무라 이하 약 50인에게 퇴한명령(10.18)을 내려 이들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하였다. 잠시 국제여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뒤 조선에서 돌발한 춘생문사건(11.28)이 일본측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웨베르·알렌 및 이범진·이완용 등 조선의 친미·친로파 인사들이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고자 한 사건이다.

그런데 일본정부와 언론은 이 사건에 주한열국외교관들이 관계되었다고 선전하며, 다른 열강들도 조선내정에 개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논조를 펴면서, 그들의 을미사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기회로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을미사변에 대한 국제여론의 비판은 잠시뿐, 각국 정부의 반응은 정반대의 기류를 타고 있었다.

영·미·러 각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외교관들의 행동을 자제토록 지시하였다. 이토오 이하 일본정부의 인물 및 각국주재 일본외교관의 다양한 사태무마책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서양 외교관들은 이 사건에 미우라가 직접 관계되어 있다는 것까지는 밝혔으나 더 이상의 배후는 추구하지 못하였다.

다만 상해에서 서양의 선교사들이 발간한 ‘북화첩보’(北華捷報 : The North China Herald)에서는 조선과 일본주재 통신원의 다양한 보고를 토대로 이렇게 보도하였다.

“사건의 주모자는 이노우에이며,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임명될 때 이미 그가 이노우에의 희생양이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었다. …… 이 사건은 미우라가 일본을 떠나오기 전에 계획된 것이다.” 결국 사건의 지휘계통은 ‘이토내각(배후)->이노우에(중개역)->미우라(하수역)’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정부에서는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 하여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의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를 받았고, 미우라가 석방되어 동경에 도착하자 일본천황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북화첩보’에서는 “일본정부는 이 음모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희색은 만면 …… 사건과 일본정부의 관계는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일본정부와 사건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19세기말 항일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신변이 위태롭게 된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96년초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의 초명)가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나,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총살한 이유중 하나도 바로 이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