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
소혜왕후는 청주(淸州) 한(韓)씨 집안의 딸로 1455년(세조1)에 수빈(粹嬪)으로 책봉되었는데.. 후일 인수대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는 본래 세자(후일 덕종)의 정궁이었지만, 왕비로 책봉 받기 전에 세자가 사망하여 역사 속에 묻힐 뻔 했으나
아들 자산군(성종)이 왕으로 즉위하여 1471년(성종 2)에 세자로 죽은 덕종을 왕으로 추존하자 인수왕비에 진책(進冊)되었습니다.
불교를 독실히 믿었으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梵) ·한(漢) ·국(國) 3자체(三字體)로 쓴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여훈(女訓)》을 남겨 후세에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 윤씨(연산군 생모)를 미워하여 폐출 사사시킨 사건으로 인하여 아들과 갈등을 야기했고 결국은 연산군을 폭군으로만든 장본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손자인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당하여 폐위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고 보복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가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쳐서 얼마 후 죽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일반적인 정사 속의 인수대비의 모습은 폐륜아인 폭군 연산에게 불쌍하게 죽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야사쪽이나 드라마에 표현되는 인수대비의 모습은 권력욕에 불타서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고간 장본인으로 묘사됩니다.
아들 성종을 왕으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소혜왕후의 권력욕이 나타납니다.
원래 예종에게는 아들(제안대군)이 있었는데...의경세자의 세자빈이었던 수빈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를 이었습니다.
자을산군의 부인(공혜왕후)이 당시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딸이다보니...제안대군, 월산대군(자을산군 형)을 모두 제치고 자을산군(성종)이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성종은 예종의 양자로서 보위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죽은 생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생모 수빈 한씨도 왕비로 추존하여 인수대비로 책봉됩니다.
그래서 덕종이 먼저냐 예종이 먼저냐 당시 예법상 많은 혼란을 가져왔는데...
이것 역시 궐에 들어와 대비가 되고 싶었던 인수대비의 야욕때문에 벌어진 혼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정치에도 많이 관여를 해서 실제 인수대비가 정치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엿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수대비의 뜻과는 달리 후궁출신인 윤비를 좋아해서 성종이 왕비로 삼고 그 속에 푹 빠져 윤비가 하자는 대로 하니까 며느리가 미웠겠지요.
아들(연산군)까지 낳아 기세가 등등해지니...사소한 것도 크게 부풀려서 결국 부부싸움에서 손찌검을 해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이유로 아들까지 있는 왕비를 쫓아내 죽여버립니다.
그리고는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은 냉대했던 무서운 할머니였습니다.이에 연산군은 할머니에 대한 공포감으로 궐내의 생활이 불안한 가운데 성장을 하였으니 결국 포악해지고 왕위에 오른 뒤, 친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때려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게 까지 됩니다.
연산군에 대해서는 누구나 폭군이라고 하고 연산군은 그 죄값을 톡톡히 받고 있으나 그 뒤에서 그 모든 것을 연출하고 연산군 모자를 괴롭힌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여걸이었다고만 말한다면 불공평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죠?
소혜왕후=인수대비는 자신의 권력욕으로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를 패륜아로 남게 한 이기적이고 악독한 성격의 여성이었다고 하겠습니다.